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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광란의 야간 자율 학습(4) [발신자. 마린. 수신자. 녹스. 제5구역 황립 도서관 B-134.]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로브의 가벼운 진동이었다.
루나틱 측에서 먼저 내게 접촉해 온 것이다. 아마 작전의 결행을 앞두고 전해올 사항이 있는 모양이다.
“지트리 잠시 대기하고 있어라.” “어디 다녀오실 예정입니까?” “그래. 잠깐이면 될 거다. …아마도.” 지트리가 눈매를 좁혔다.
그녀가 양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렇게 마지막에 붙이는 ‘아마도’는 늦으신다는 뜻으로 해석하라는 말씀이시죠?” “역시 내 메이드 군. 눈치가 빨라.” “하아…… 이제 뒷배까지 생겼다고 막 나가시는 건가요? 아무리 황녀님이 뒤에 계신다고 해도 이곳은 생도들이 배움을 청하는 곳이고, 혹여나 외출증 없이 나가게 되면 추후에 반드시 문제가…….”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의 지트리 앞에 한 장의 종이를 펄럭여 보였다.
그것은 무려 외출증. 얼마 전 라스에게 뜯어낸 것이었다.
라스는 내가 마법 연구를 위해 도서관에 방문하려 외출증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헛헛하게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여기 있다. 필요하다면 내 이름은 얼마든지 팔아도 좋아.
-거절은 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름을 팔다니…….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게.
-…….
나는 차마 거기서까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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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라스가 건넨 파워볼실시간 외출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생도 외출증
발급자: 라스 폰 셀레스티아 기간: 내가 그만이라고 할 때까지.
사유: 내 제자.] …….
어쨌든 잘된 일이긴 하다. 실시간파워볼
라스가 이렇게 순순히 허락해 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지만.
어쨌든 나는 외출증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밤에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여러모로 다른 이들에 비해 유리해졌고, 히든 피스를 얻기에도 최적화된 것이다.
루나틱 활동을 파워볼사이트 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저녁 시간에 움직일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중요하기에 나는 조용히 걸음을 내디뎌 5구역의 황립 도서관으로 향했다.
엘리데인 소유이지만, 결과적으로 황제의 직속 기관 중 하나이니…… 여기서는 눈치를 좀 봐야 한다.
그곳에서 암호에 적혀 있는 B-134를 찾았다. 파워볼게임
그곳엔 나와 같은 로브를 쓴 푸른 머리칼이 삐져나온 한 소녀가 대기 중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마린이 조심스럽게 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그로부터 찬연한 보석처럼 박힌 눈동자가 빛났다.
그것은 제 엔트리파워볼 머리칼보다 더 짙은 심연의 색을 띠고 있었다.
아름답다, 단지 그런 말로 표현하기에는 어딘가 미묘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있었다. 퇴폐적인 느낌이 섞여 있다고 해야 할까?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아름다워진 듯한 모습이다. 아무래도 바깥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좀 더 못나게 꾸민 것이겠지.
어쨌든 나는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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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사수. 다시 보는군.” 마린의 얼굴이 잠시 구겨졌다.
아마 틀림없이 [젊은 꼰대] 특성의 영향이겠지.
실제로 그녀의 표정은 이런 새파랗게 젊어 빠진 놈이…….
와 같은 표정이 배어있다.
여러모로 개성이 확실한 캐릭터다 싶다.
“녹스 폰 리인하버. 기다리고 있었어. 널 이곳으로 부른 건, 이번 첫 번째 임무의 수행에 네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야.” “확인?”
“그래.”
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었다.
“네가 아무리 루나 님의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아직 나는 아니야. 더군다나 너와 내가 함께 싸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러지. 임무에서도 언제든 변수가 생기게 될 수 있으니.” 나는 금세 납득했다. 그녀로서는 아마 내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제안을 건넨 것이겠지만,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마린의 실력에 대해 나 또한 불안을 갖고 있던 참이다.
이 기회에 서로가 가진 능력을 확인해두면 이후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어떻게든 대처가 가능할 것이다.
마린은 내가 쉽게 승낙할 줄 몰랐는지 아주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표정을 되찾더니 다시 스크롤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임시 아지트. 그 쇠파이프가 굴러다니는 습한 곳으로 전송하는 식이 새겨진 물건이었다.
“이런 쓰레기 같은 곳 말고 다른 곳에서 겨룰 순 없는 건가.”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불평하지 마. 말단이잖아. 원래 말단에겐 선택지가 없는 거야.” 부욱.
마린은 그렇게 볼멘소리를 하며 스크롤을 찢어 금세 사라졌다.
나 역시 그녀가 한 행동을 그대로 반복했다.
이윽고 짧은 시야의 명멸 후, 우리는 익숙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해 있던 마린이 빠르게 마력을 개방하기 시작한다. 저건 누가 봐도 먼저 마력을 준비해 한 방 먹이겠다는 소리다.
지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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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먼저 와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니. 너도 꽤 망나니 같은 짓을 하는군.” “어련하시겠어. 근데 그거 알아?” 마린은 어느새 등 뒤에 매달고 있던 아티팩트. 활을 시동한 뒤, 만들어낸 수속성을 띤 마력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피잉!
이어 그녀가 활을 재빠르게 놓는다. 안정적이고도 빠른 동작이다. 역시 루나틱의 멤버라는 것일까?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이어 그녀가 소리친다.
“먼저 때리는 놈이 대개 필승이야! 그리고…… 우리 같은 범죄 집단에서는 그게 덕목이라고!” 의기양양한 어투로 쏘아낸 화살.
하지만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저 검집에 손을 얹었다.
그런 뒤 숨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한다. 이어진 동작은 아주 가볍지만 확실하게. 군더더기 없이 한 폭의 그림처럼 이어졌다.
‘좋아. 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나는 옅게 미소를 머금는다.
과연 천재 특성답게, 검은 빠르게 발도 되었고 어느새 지근거리. 눈앞까지 도달한 활이 머금은 마력을 그대로 양단해버린다.
콰아아앙!
두 갈래로 찢긴 화살이 바닥 아래 양쪽에 기다란 자국을 만들어낸다.
최근 글러트니와의 싸움으로 암흑가 검의 경지가 중급에 다다른 덕분이다. 어쩌다 보니 그 강아지한테는 도움받은 게 많다.
나중에 개껌이라도 하나 사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놀란 마린의 얼굴을 보며 오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이렇게 될 게 당연하다는 듯한 얼굴.
그리고는 선언하듯 말한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지이이잉!

어느새 발현된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가닥의 암흑 마법 [다크 스피어].
그것들이 내 손의 움직임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적을 향해 조준된다. 마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이다.
“자, 잠깐…! 후배? 기다려! 기다리라고…!!”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망나니다.
그러므로 먼저 맞았으면.
콰과과과광…!!
두 배로 갚아줘야 한다는 말이다.
“미친… 놈…… 선배를 어떻게…….” 이 와중에도 꼰대 짓을 하는 것을 보자니 꽤 안쓰러울 지경이다.
나는 넋이 나간 몰골의 마린을 위로해주었다.
“걱정 마라.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니 너도 3년 정도 더 노력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다. 네겐 충분히 재능이 있어.” “으으…!!”
하지만 마린이 되레 분개했다.
칭찬을 해줘도 난리구만. 나는 태연히 검을 검집에 넣은 뒤, 주변을 살폈다. 곧 그녀는 전투의 여파인지 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하나, 그때였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마력이, 쓰러진 마린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뭐지?”
미간이 구겨진다.

마력에는 짙은 살기. 그리고 혈향이 어려 있었다.
나는 즉시 반응했다.
‘이건… 위험하다.’ 마력이 발현된 근원지는 다름 아닌 나의 사수 마린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떠올랐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척추반사처럼 사고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무줄처럼 튕겨버린 생각과 이미 자루에 올라가 버린 손.
‘죽인다.’
생각한 내가 즉시 뒤를 돌아, 스톰브링어로 마린을 베어내려 휘두른 때였다.
카아앙-!
검에서 불꽃이 일며 어느새 나타난 한 여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채 느끼지도 못한 순간 지근거리로 다가와 내 검을 한 손으로 막아냈다.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지?
반추는 짧은 순간 끝없이 이어졌다. 이윽고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내 검을 막아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루나틱의 수장. 루나라는 것을.

“선후배 간의 대련치고는 너무 격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끼어들었어. 무례했다면 사과하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루나는 나를 질책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녀의 관점에서 나는 개미만도 못한 실력자니까. 더구나.
만약 루나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사수를 죽였을 것이다.
지금 상황은 내가 너무 과민반응한 게 틀림없다.
분명 그래야 할 터인데…….
‘조금 전 마린에게서 느껴졌던 그 마력. 그것은 분명…….’ 루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잘했어. 너는 조금 전, 검을 뽑지 않았다면 마린의 활에 즉사했을 테니까.” “…예?”
“이야기하기 좋은 밤이야. 만월이 가까워지고 있어.” 루나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집어넣었다.
“잠시 걸을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아무래도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가 마린에게 준비돼 있었던 모양이다.
27회의 플레이로도 알 수 없었던 이야기.
지금 그것이 시작되고 있었다.
게이머로서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제안이었다.

잠시 후.
루나의 말대로 달이 가득 차 보름달에 가까워진 밤.
나는 무려 루나틱의 수장과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초로를 걷던 루나가 잠시 고민하더니, 먼저 입을 뗐다.
“맹랑한 신입. 너도 조금 전에 느꼈겠지만, 마린은 가끔 저렇게 이성을 잃어 폭주해. 굉장한 재능을 지녔지만, 아직 그 재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지. 그래서 여전히 그녀가 실력을 가졌음에도 말단에 그치는 거고.” “그럴 것 같았습니다. 아까의 살기는 도저히 검을 뽑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딱 한 발의 화살이었어.”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되묻자, 루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가 루나틱에 입단하게 된 계기는 오직 한 발의 화살이었다. 마린은 그리 강하지 않지만, 단 한 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준비해 쏘아낸 한 발의 화살의 파괴력만큼은 달라. 그건 나조차 쉽게 막아낼 수 없을 정도야.” “단장님께서도 막아내기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당황했다.
무려 3인의 검제인 루나가 고작해야 엑스트라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렵다니?
더구나 마린이 가진 것은 고작해야 [워터샷]이 아니었던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루나가 차분히 이어왔다.
“잘 들어. 마린. 그 아이는 과거 존재했던 해인(海人)의 마지막 후손이야. 물 원소를 극도로 다룰 수 있는 특수한 체질을 타고났지.” 나는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는 설정에 경악했다.
“설마 해인이라면…….” “그래. 드래곤과 마찬가지로 이미 실전된 인간족이었지만, 마린은 아니야. 그녀는 인간의 욕망으로 강제로 태어난, 해인의 피와 힘을 물려받은 아이. 때문에 힘이 완전하지 못해 지금과 같은 폭주가 자주 벌어져.” 이제야 이해가 될 것 같다.
어째서 그녀가 메인 스토리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지.
나 역시 게임의 설정에서 읽은 적 있었다.
해인족의 수속성에 대한 유달리 특수한 반응과 증폭 현상에 관해 황가 측에서 오랜 시간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인체실험이 자주 자행되었다는 것.
그 결과가 아무래도 마린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수라고는 해도, 마린은 너를 꽤 힘들게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내가 그녀를 너에게 붙인 것에는 이유가 있지.” “그 이유란 게…….” “너는 차가워. 소스라칠 정도로… 하지만 루나틱의 다른 멤버들은 그렇지 못하지. 그래서 네게 그녀를 맡긴 거야. 최악의 순간 그녀가 지금처럼 폭주한다면.” 루나의 금안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네가 그녀를 죽여. 너에게는 그럴 힘이 있으니까.” 나는 즉시 알아들었다.
마린을 죽일 힘이라는 것…….

사실 이는 모든 루나틱의 멤버들이 가진 것일 터다.
루나도 그렇고, 더프도. 뒤에 등장하게 되는 다른 캐릭터들도.
하지만 그들이 과연 마린을 죽일 수 있을까?
‘아니겠지.’
루나틱은 유독 게임에서 현실적으로 묘사되었던 집단이다.
범죄 조직답지 않게 정에 쉽게 휩쓸리기도 했다.
그랬기에, 결국 황녀 시해 사건에서 그 파국이 정점에 이른 것이다.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또한, 캐릭터들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읽어낼 수 있다. 지금 루나는 부탁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
고작해야 하루 이틀 본 게 전부인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리인하버 가의 망나니인 내가. 그녀를 죽여주길 바라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 알았다. 원작에서 마린을 죽인 사람이 누구였는지.
‘루나. 그녀가 결국 폭주한 마린을 죽였던 거야.’ 가장 아끼는 유닛이기에. 또 다른 이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수 없기에. 루나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기로 한 것일 터다.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루나가 기뻐하지 않을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는…… 사수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물론 말씀하신 임무는 수행합니다. 다만, 제가 어떻게 그 임무를 처리할지는 제가 온당히 결정할 문제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내 말에 루나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녀가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이에 마린과 정이라도 든 거야? 어설프게 둘 다 구하려다가 실패하는 사람을 지금까지 난 여럿이나 봐왔어. 그건 결국…….” “저는 감당할 수 있는 일만을 벌입니다. 믿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임무에 차질이 생기거나 실패하게 된다면, 저 역시 당신의 손으로 죽이십시오. 마린… 사수를 죽이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쉬운 일일 테니까.” 나는 그렇게 답했고, 곧 루나와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평행선을 달리는 듯했으나, 결국 둘은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
그 마음이 작용했기에, 루나 역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랬기에 나는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루나.
미래의 너는 대체 왜 황녀를. 아니, 황제가 되어버린 페넬로페를 죽이려 한 거지?

“에…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마수라는 놈들은 에… 하나같이 영악하기로 유명합니다. 에… 던전에 처음 들어가거나, 필드에서 처음 마수를 조우했다면 절대로 홀로 그들을 상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지론이지만, 나는 이를 새겨들었다.
이건 장난이 아닌 현실이다.
소방 훈련을 할 때, 불이 났을 때를 상정하지 않고 웃고만 있다면 안전 불감증에 사로잡혀 결국 사고가 터졌을 때 죽게 된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이런 이론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는 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양옆에 페넬로페와 탈리아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가장 위험한 쪽은 탈리아였다.
그녀는 은근히 기쁜 얼굴로 오늘 만나자마자 내 넥타이가 바로 잡혀있는지 확인했다. 그러고는 멀쩡한데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넥타이가 약간 삐뚤어졌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복도에서 사람이 더럽게 많은 와중에 내 넥타이를 굳이 풀었다가 새로 매 주었다.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갈라져 복도 끝으로 바싹 붙어 걸었다.
마치 닿으면 안 되는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야기하긴 좀 뭣하지만 약간 호러였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시달리던 와중.
페넬로페는 몰래 찾아와 말하기까지 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괜찮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애정행각은 자제해주세요. 제 체면이 있으니까요.” 페넬로페의 떳떳한 말에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황녀가 아무리 제멋대로 일을 그르쳤다 해도 방법이 딱히 없는 게 사실이긴 하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황가의 사윗감 후보가 아닌가.
쉽게 말해, 다른 여자랑 놀아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다른 여자랑 놀아난 적이 있기는 하던가?
애초에 사람이랑도 친하지 않은 내가 여자가 있을 리가…….
젠장.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바득바득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더니 돌아온 것이 이거라니.’ 새삼 내 처지가 처량할 정도다.
“제길.”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그렇게 외쳤더니, 양쪽에서 두 시선이 나를 동시에 향한다.
“왜 그러시죠?” 황녀의 물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녹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플리첼 교수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에… 그러니까. 마수들은 기본적으로 지능의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마수가 아닌 존재들. 에… 이를테면 악마와 같은 녀석들은 다르죠. 그들은 위험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을 파고들어서 서서히 굴복시켜가기 때문이죠. 에… 그러니까…….” 악마에 대한 설명.
이는 가볍게 진행되었지만, 나는 그들의 무서움에 대해 새삼 상기했다. 그리고 마린과 치러야 하는 이번 작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마린이란 캐릭터는 작중에 등장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번 에피소드에서 죽게 될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루나의 손에 의해서.
‘이제 슬슬 마린의 계획도 모두 준비가 끝났겠네. 식도 완성됐을 테고.’ 나는 마린이 시키는 대로 한동안 라스 교수와 도서관에서만 만나 대화를 나눴다. 그곳은 말하자면 교수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신이 나서 멋대로 지껄였다.

-자네가 고른 마도서가 어떤 것인지는 ‘정말로’ 궁금하지 않지만, 어떤 것인지에 따라 내가 익히는 것을 도와줄 수도 있…….
-말씀 안 드릴 겁니다. 괜히 힘 빼지 마시죠. 교수님.
-그렇…겠지. 어쨌든 이곳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는 책 중에서도 분명 훌륭한 것들이 몇이나 있지. 우선 내가 추천하는 412권을 모두 독파하게. 그러면 비로소 마법사로서의 길이 보이기 시작하며, 원소 마법과 특수 원소 마법에 대한 이해가….
뒷부분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무리 이너 루나틱의 덕후였던 나라고 해도, 라스 교수의 말을 모두 이해하는 것 자체는 아예 다른 영역이었다.
괴물 같은 자식…….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날 수업도 모두 종료되었다.
나는 탈리아와 페넬로페가 묘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
그리고 앞에서 나를 경멸하는 표정의 엘레노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
리온이 과연!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모두 바라본 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시두스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지트리 역시 차가웠다.
“도련님의 업보입니다.” 내 메이드는 지나칠 정도로 냉정했다.
그래서 좋긴 하지만…… 가끔은 주인 편도 조금 들어줬으면 좋겠다.

드디어 사건의 결행 당일.
본격적인 첫 번째 메인 에피소드가 그 서막을 올렸다.
수업을 마친 후. 평소와 같이 야간 자율학습이 진행되던 때.
갑작스레 바닥이 진동하며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이윽고 한 차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소란이 잦아들었다.
당연하지만 마지막 날이므로 교관도, 교수도.
그 누구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가장 먼저 결계를 감지한 리온이 말했다.
“……아무래도 갇힌 것 같군요. 누군가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도록 수를 쓴 것 같습니다. 마치… 처음 마인과 만났을 때처럼 말이에요.” 당연히 그렇겠지.
이 에피소드를 위해서 그 마인 루드거 에피소드가 빌드업 된 것이니까.
나는 속으로 이를 삼키며 덤덤히 말했다.
“외부의 지원을 기대하는 건 어렵겠군. 우선은 여기서 교수의 지원을 기다리지.” 나는 착실히 녀석들을 데리고 시간을 끌기로 했다.
물론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내 계획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지만.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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